2017년 8월 7일 월요일

덩케르크 (스포 포함)

크리스토퍼 놀란은 서로 상반된 관념 간의 벽을 허물어 그것의 본질을 세련되게 표현해내는 일의 귀재다. 놀란은 다크나이트에서 선과 악을 겹쳐서 그려내고, 인셉션에서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삭제하며, 인터스텔라에서는 분리된 시공간을 통합시킨다. 그리고 덩케르크에서는 삶과 죽음을 끊임없이 교차시킨다. 전쟁이라는 전형적인 소재는 영화의 표면을 장식하는 데에만 쓰였다. 영화 안에서 놀란은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를 인식의 세계 속 깊은 곳 어딘가로 끌고 내려간 뒤 마구 휘저어 놓는다.

죽음은 천재지변처럼 급작스럽게 찾아온다는 점을 덩케르크는 보여준다. 독일군의 공습이나 어뢰 공격에는 특별한 전조가 없다. 폭격기는 갑자기 나타나 삶을 앗아가고, 어뢰는 절망의 바다를 떠다니는 삶의 희망들을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낸다. 예고 없는 독일군의 공격에 대응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불쑥 나타난 죽음이 나만큼은 보지 못하고 지나쳐주길 바랄 수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가끔 누군가는 죽음을 대비하거나 죽음에 대응해 살아 남는다. 남들이 삶의 기쁨을 나눌 때 갑판 위에서 혼자 침몰을 두려워했던 깁슨, 죽음의 공포가 드리웠을 때 차분하게 배를 조종해 폭격을 피한 도슨은 죽음을 의식적으로 회피할 수 있었다. 희망의 꼭대기에서 절망을 대비하고, 절망의 한 가운데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물들이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탐욕하게 만드는 것이 생존본능이지만, 그 본능을 억제한 인물들이 생존의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남았던 깁슨은 나중에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라는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죽는다. 깁슨처럼 조심성이 많은 인물조차 피할 수 없는 형태의 죽음이다. 죽음을 한 번 회피했던 경험이 반드시 다음에 닥칠 죽음을 피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치만 내가 가장 섬찟하게 느낀 것은 폭격도 어뢰도 깁스의 죽음도 아닌 피터의 친구인 조지의 죽음이었다. 조지는 구출된 병사와 도슨의 실랑이에 휘말려 선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죽는다. 죽음이 얼마나 일상에 널려 있는 존재인지를 나타내는 대목이다. 전쟁처럼 특수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죽음은 늘 삶의 곁을 맴돈다. 평소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거나, 인식하더라도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죽음은 급작스럽고 회피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공포의 대상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사실은 일상을 함께 한다는 속성 그 자체가 가장 무시무시한 것이다.

, 본성을 거스르면 때때로 회피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대상이며, 또한 언제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희미하게 가르는 게 결국 운명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명론을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이 부분이 꽤 무겁게 느껴졌다. 본성을 거스르려 노력하거나 삶에 대한 의지를 가져봤자,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주된 요인이 그저 운명이나 운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너무 슬프고 답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존은 곧 운명이라는 통찰이 삶을 내려놓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어차피 생존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문제이니 대충 살자, 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영화에서도 생존에 대한 의지를 포기해버리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생존이 운명이라는 점은 삶과 죽음을 겸허하게 대하는 재료 정도로 쓰이면 충분하다. 죽음이 단지 불운이었기 때문에 조지의 죽음에 피터는 침착할 수 있었고, 삶이 단지 행운이었기 때문에 구출된 병사들은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함부로 들뜨지 않았다.

'생존이 지닌 운명적 면모를 이해하고 죽음에 대한 경의와 삶에 대한 겸손을 지킨다. 그리고 생존이 운명이라면 운명에게 선택 당하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운명을 찾아 다닌다.' 이것이 내가 이해한 덩케르크의 메시지이자, 아마도 내가 인식하고 있는 삶과 죽음의 전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