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9일 월요일

2015년을 준비하며, 그리고 30대를 맞이하며.

고교시절, 메가스터디에서 수십억이 든 돈가방을 가지고 노량진 학원 선생님들 스카웃에 나섰다는 소문들과, 엄청나게 높은 실용음악과 입시 경쟁률을 보면서 음악 교육 비즈니스를 떠올렸다. 치밀한 고민의 결과였다기보다는, 당시 나의 최대 관심사가 음악이었다는 점과 공부에 대한 무관심이 조합된 어설픈 공상에 가까웠다. 외고 입시를 목표로 해둔 지나친 선행학습 때문에 공부를 하지 않아도 그럭저럭 점수는 나왔고, 무엇보다 내가 무슨 일을 좋아하는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전혀 몰라 대학에 관심이 없었다. 방과 후 같은 관심사를 가진 친구끼리 모여 국내외 셀러브리티들의 연주와 가창에 대해 토론하고, 녹음하고, 분석했다. 수능 100일 전 즈음에도 나는 김범수 콘서트장에 있었다. '어떻게든 졸업만 하고 시간이 생기면 내 비즈니스를 시작해 볼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꽤나 한심했다.

그렇게 졸업만을 기다리던 중, 우연히 어머니께서 사 오신 주식서적을 접하게 되었다. 기술적 분석 내용을 담은, 당시 베스트 셀러였던 한 변호사의 책이었는데, 그 길로 코엑스 서점에 달려가 주식 서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버핏, 로저스, 소로스는 정말 멋졌고, 타짜 냄새가 풀풀 나는 휘황찬란한 차트 서적들도 흥미로웠다. 음악 비즈니스는 이미 머리에서 지워져버렸다.

당장 거래를 시작하고 싶었지만 여건이 문제였다. 어머니는 개방적인 분이지만,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집에서 주식을 하겠다는 것을 허락해 주실만큼은 아니었다. 나는 재수를 하겠다고 말씀드린 후, 경제 공부라는 핑계로 주식계좌 개설을 부탁드렸다.(만 20세 미만이라 계좌 개설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런 뒤 1년치 용돈을 가불받았고, 재수학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공부할 것을 선언했다. 2005년 2월, 20살이 되던 해, 그렇게 내 트레이딩룸이 완성되었다.

투자를 쉽게 접근해야한다는 격언을 지나치게 받아들였던 나는 기초적인 분석도 하지 않은 채 시장에 뛰어들었다. 대부분의 종목이 상승했던 시기였기에, 대충 분석해도 포지션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조금씩 수익은 났다. 그리고 그렇게 엉망으로 투자하던 중, 서울음반이라는 주식이 눈에 들어왔고 아무 근거도 없이 상장되어 있는 음반회사라는 것 하나만 보고 서울음반에 올인했다. 무식함에서 비롯된 용감함이 발동한 것이다. 문제는 매수 후 바로 다음날 터졌다. Sk에서 서울음반을 인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지금의 로엔이다). 서울음반은 그 다음날부터 연일 상한가를 기록했고, 나는 5일 이동평균선 하회를 근거로 주식을 처분했다. 일주일만에 두 배의 수익률을 올렸다. 그것이 불행의 시작이었다.

비기너스럭을 실력으로 착각한 나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나갔다. 일단 서른살까지 100억만 벌어 은퇴해야겠다는 목표를 잡았다. 당시엔 나름 '너무 빠르게 버는 것은 현실성이 없으니깐, 10년동안 100억이면 적당하겠다' 라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한 1년 정도의 성공적인 투자 내역을 공개하면, 집에서도 내 계획을 이해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목표가 허황된 것임을 깨닫는 데에는 정확히 5개월이 걸렸다. 코스피가 1000포인트를 돌파해 안착해 나가는 역사적 국면에서 나는 원칙없는 빈번한 매매로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약 일주일 정도 엄청난 좌절감에 파묻혔다. 자발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찾아 나름대로 열심히 했는데 실패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팔면 오르고 사면 내린다는 인터넷 후기들을 보며 비웃었었는데, 어느새 내가 그 글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좌절 후에 도달한 결론은 '공부가 부족한 것이다' 였고, 이불에서 기어나와 주식을 배우려면 무엇을 전공해야 하는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이 경영/경제 학과를 추천하길래 부랴부랴 수능을 치룬 후 대충 점수가 맞는 학교의 경영학과에 입학했다.

목표와 계기를 바탕으로 하는 대학 생활은 재미있었다. 금융에 관련된 수업들을 모조리 신청해 듣고,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 주식 서가의 책들을 보기 시작하여 1학년 2학기가 끝날 때 쯤 다 읽었다. 캠퍼스 내 동선에 보이는 컴퓨터마다 HTS를 설치해 시세를 가끔 확인하기도 했고, 관련 동아리도 직접 조직해 운영했다. 학과 공부는 흥미롭기도 했고, 투자금을 등록금으로 써 버리는 것도 싫어 꽤 열심히 했다. 덕분에 4년간 총 500만원이 채 안되는 돈만 학교에 내고 졸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를 해도 시장에 대한 예측력은 향상되지 않았다. 전통적인 가치투자 스타일을 추종했던 동아리 형의 말처럼, 절대적 염가에 거래되는 주식을 찾아 수익이 날 때까지 보유하는 것이 투자의 전부인지 늘 고민했다. 그런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겠지만, 매년 단위로 수익을 기록하는 투자자들을, 파생상품 트레이더들을, 그리고 소로스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해 보였다. 좀 더 투자라는 행위의 속성을 이해하는데 전념하고 싶었고, 마침 입대시기도 다가와 2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인사이트 펀드가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는 한편, 박경철씨, 김학주씨, 김영익씨는 중국의 버블 가능성을 경고하는 흥미진진한 시기였다. 특히 김학주센터장의 '중국은 달리는 자전거다. 멈추면 넘어진다.'는 표현은 매우 인상깊었었다.

당시 내가 한창 파생상품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시기였기에, 휴학과 동시에 파생상품 이론과 트레이딩 테크닉들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선물과 옵션의 기초를 공부하면서 매매전략과 기술적 분석에 대한 책들을 읽고 정리하는 것을 병행했다. 특히 기술적분석은 그 효용성에 대한 고민을 해결해 보고자 대중적인 지표들의 계산법과 역사를 거의 다 뜯어보고 노트에 요약했다.

약 6개월 동안 공부한 후에 얻은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파생상품은 변동성 게임이다. 전략은 손실을 작게 하고 수익을 크게 하는 것을 뜻하는데, 그 중 하나만 고르라면 손실을 작게 하는 것을 택해야 한다. 기술적 지표는 분석의 근거가 될 순 없지만 참고하지 않을 수도 없다. 각기 다른 시기에, 다른 시장에서, 다른 계산법을 통해 가격을 분석했던 수 많은 기술적 분석가들이 가리키는 포인트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그리고 나는 이 결론을 근거로 디테일한 매매전략을 하나 짰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일반적인 변동성을 벗어나는 국면을 찾아 짧은 로스컷을 걸고 진입한 뒤 청산은 테크니컬한 지표를 참고하는 전략이었다. 간략한 검증 기간을 거친 뒤 옵션 매수전용 계좌를 통해 직접 거래에 나섰다. 그 때가 2008년 5월이었다.

금융위기가 시작되던 시기의 높은 변동성과 맞물려 내 전략은 승승장구했다.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 동안 누적 수익률은 무려 500%를 초과했고, 월간 기준으로도 8월 한 달을 제외하고는 매월 수익을 냈다. 투입 금액이 크지는 않았지만, 학생 신분으로는 아주 적은 액수도 아니었다. 마침내 성배를 찾았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아침에 일어나 3시까지 트레이딩 한 뒤, 4시까지 그 날 시장을 정리하고, 책을 보거나 운동 하거나 친구들을 만났다. 책에서만 봐오던 성공한 트레이더의 미니어쳐쯤을 경험했던 셈이다.

그렇게 들뜬 기분과 늘어난 계좌 잔고, 폭락하는 시장을 뒤로 하고 2008년 11월 입대했다. 아쉽기는 했지만 참을만 했다. 전략은 터득했으니 전역 후에 투자를 재개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훈련소로 간략한 시황을 담은 편지를 보내달라고 부탁하긴 했다.

군 생활 중에도 시장 업데이트와 독서는 계속 했고, 내 전략이 여전히 잘 통하는지에 대한 테스트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그것은 나에게 매매를 못 한다는 괴로움과 전략이 아직 유효하다는 안도감을 동시에 안겨주는 일이었다. 입대 후 1년까지만 해도 내 전략은 상당히 잘 맞는 편이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애초에 평균적인 변동성이 높아야 작동하는 내 전략은, 전역 일자가 가까워지고 시장이 금융위기의 그늘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날 수록 점점 부정확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역한 후에는 완전히 Whipsaw의 재물이 되는 전략이 되었다. 전역 후 2개월 정도 필터링과 변수를 변경해 매매해보았지만 손실만 기록하고 접어 버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특정 국면에서 작동하던 전략이 언젠가 쓸모 없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 때는 내 전략에 대한 자기신뢰가 너무 강해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생각을 하지 못했다기 보다는, 받아들이기 싫었던 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드디어 내 손으로 찾은 성배가 녹아내리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알고리즘 트레이딩이 너무 많아져서 시장에 노이즈가 급증한 영향이다' 라는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오기로 알고리즘 트레이딩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경영학과 학부 수준의 수학과 통계적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알고리즘 트레이딩을 공부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가능한한 컨셉이라도 이해해보려 애썼다. HFT는 결국 빠른 주문 속도를 기반으로 시장 룰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틈새를 비집는 것이었고, 모델링을 기반으로 하는 트레이딩은 어떤 모델을 적용할지에 대해 투자자의 최종적인 인사이트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만능은 아니었다. 나도 못 만들 이유는 없다는 생각에 평소 가지고 있던 아이디어를 엑셀에 어설프게 옮긴 뒤, 수학을 전공하는 동생에게 부탁해 binomial model을 통해 구현해 보았다.

결과는? 기대 수익이 아주 정확하게도 0에 수렴했다. 수수료와 슬리피지를 지불하는 속도에 비례해 훌륭하게 죽을 수 있는 모델이었다. 그 때가 복학 후 3학년이 끝나가던 시기였는데, 회의감과 허탈함이 극에 달했다. 시장을 쳐다보기도 싫어 보유 중이던 주식도 전부 처분했다. 30살에 100억은 커녕, 과연 내가 투자를 업으로 삼을 수나 있을지, 삼을 수 없다면 이제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교수님들에게 상담을 요청하면, 90%는 대학원 유학을 권하고, 10%는 어느어느 회사가 좋다는 추천을 했다. 모두 다 내가 원하는, 끌리는 답은 아니었다. 학교도 다니기 귀찮아져서 4학년 1학기에 24학점을 이수한 뒤 조기졸업해버렸다.

졸업 후 고민을 이리저리 해 보았지만, 결국은 업무강도 대비 페이가 좋은 직장에서 일하며 장기 보유식의 개인 투자로 자산을 불려나가는 것이 내 인생의 최선으로 보였다. 그런 방향에 가장 잘 맞는 곳은 금융권 공사라고 판단해 지원했고, 운 좋게도 모 국책은행의 면접 기회를 얻었다. 1차 면접에서 면접관들이 나에게, '본인 생각에 대학 등록금이 싸다고 생각하는가? 비싸다고 생각하는가? 30자내로 설명해 보라' 고 요구했고, 나는 '학교 공부만 했는데 입행 필기시험에 합격한 것을 보면 싸게 다닌 것 같다' 고 답했다. 세 면접관 모두가 아주 크게 웃었고,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했다. 1) 1차 면접은 합격 했구나, 2) 이 정도 대답에 크게 웃을 정도로 이곳은 보수적이구나. 둘 다 적중했다.

하지만 정작 그 국책은행의 최종면접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날 밤 나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합격하지 못할까봐 가슴을 졸여서가 아니라, 합격 후에 펼쳐질 평범한 샐러리맨 인생이 두려워서. 취업 자체가 어려운 시기에, 무려 국책은행을 합격해 놓고 가지 않을 자신은 없으니 분명히 다니게 될텐데, 시장이란 공간과의 인연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것인가 싶었다. 아마도 그 날 합격 결과를 기다리던 사람들 중에 합격될까봐 진심으로 두려워했던 사람은 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그 곳에 간다하여 시장 관련 커리어를 밟을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안정적인 분위기에 매몰되어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체육면접이랍시고 단체 줄넘기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좀 화가 났지만, 그래도 그렇게 후련할 수가 없었다. 그 길로 증권사, 운용사, 자문사 등에 지원서를 적극적으로 내기 시작했고, 결국 또 다시 운이 작용하여 한 금융기관에 입사했다. 그리고 1년씩 각기 다른 부서에서 일을 하다보니 20대가 끝났다. 타 업계 종사자가 이 글을 읽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 세대의 투자관련 업종 종사자로서는 아주 전형적인 스토리 중 하나일 것이다.

즉, 나의 20대는 투자와 공부가 키워드였다. 음악과 운동도 있었지만 그것은 머리를 식히는 수단에 불과했다. 사랑도 있었지만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시 새로운 만남을 지향할 때 발생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투자와 공부로 치환했다. 신나게 놀기도 했지만 어떤 놀이도 투자만큼 재미있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의 30대의 키워드는 무엇이어야 할까. 역시 투자와 공부일 것이고, 다만 사람이라는 단어가 하나 추가될 것이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대단히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회사에 다니면서 절감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투자나 리서치 역시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깊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다. 30대의 목표는? 50억을 모아 은퇴해 투자자하며 사는 것. 액수와 은퇴 후의 계획이 조금 바뀌었다.

이처럼 다소 엉성한 그림을 바탕으로 세운 2015년 계획은 대략 이렇다.

1. 블로그는 계속 쓰고, 한 달에 하나는 영어로 포스팅을 한다. 영어에 대한 피드백은 유학다녀온 사내 동료의 도움을 받을 계획. 그리고 포스팅 횟수가 조금 줄더라도, 투자에 대한 글의 비중을 확대하려 한다.

2. 점심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활용해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업계 사람일수록 저녁보다는 점심시간의 집중력이 높았다. 최대한 식사를 빠르게 하고 카페로 가는 것이 좋다.

3. 좋은 인상을 받았던 사람에게 먼저 다가간다. 시간이 맞는다면 소규모 모임을 만든다.

4. 책을 읽을 때 메모와 정리를 적극적으로 한다. 즉, 공부하는 기분으로 한다. 어차피 책을 사서 읽는 편인데, 그 동안 무엇을 위해 북마크만 하며 책을 깨끗하게 읽었을까? 다독만 해서는 나에게 남는 것이 없다.

5. 운동은 지금 하는 헬스와 검도로 족하다. 더 추가하지 말자.

6. 무리 없이 아웃소싱이 가능한 것들은 최대한 아웃소싱하여 내 일에 집중한다. 매크로 분석력과 리서치 업그레이드를 위한 기본적인 공부에 시간을 더 할애할 것.

7. 평일 수면 시간을 더 줄이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주말 수면 시간은 줄일 수 있을 듯 하다.

8. 여행 횟수를 줄인다. 올해 의식적으로 많은 여행을 다녔고, 여행 경험은 이정도면 충분한 듯 하다. 여행은 재충전적인 측면과 소모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둘을 상쇄하면 남는게 크지는 않다.

최선의 방향을 따라 세부 계획들은 다듬어 나가겠지만, 위의 8개 내용들은 크게 수정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목표를 달성하는 30대가 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 2015년이 되길 바라며.

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읽을 책,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리뷰를 쓰려는 책이 쌓여 있지만 그래도 선물 받은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맞겠다 싶어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를 오늘 다 읽었다. 소설이나 수필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는, 선물 받지 않았더라면 접해 볼 일이 없었을 따뜻한 책이다. 그래서 책을 주고 받거나 돌려 보는 것은 즐겁다. 독서의 편식을 많이 줄일 수 있기 때문.

메모와 북마크를 많이 했지만 결국 책을 덮고 떠오르는 것은 세 가지다. 중국화 하는 한국, 글쓰기, 산채현상.


1. 중국화 하는 한국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마오쩌둥 시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막연한 그리움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 정말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마오쩌둥 시대는 비록 생활이 궁핍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압박이 심했지만, 보편적인 잔혹함이나 생존경쟁은 없었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완전히 다르다. 극심한 경쟁과 거대한 압력이 수많은 중국인의 생활과 생존을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사회 환경에서는 자연스레 약육강식의 논리와 함께 호화스러운 사치 추구와 온갖 속임수가 유행한다. 따라서 자신의 본분에 만족하면서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도태되고 담이 큰 사람들만 성공한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56page)

'차이'라는 단어가 좁은 의미에서 넓은 의미로 확대되고 공허한 사상에서 실제적 상황으로 변해버린 뒤, 오늘날 중국이 안고 있는 사회문제의 확장과 사회갈등의 격화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205page)

어떤 사람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오늘날 자녀 하나를 대학에 보내려면 도시 주민의 4.2년치 수입을, 농민의 13.6년치 수입을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대약진식 신입생 모집으로 인해 대학졸업생들의 취업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현재 매년 백만 명 이상의 대학 졸업자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고, 이는 이미 중국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자녀들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부모들이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자녀들은 졸업과 동시의 중국의 방대한 실업자 대열의 일원이 되고 만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229page)



단어 몇 개만 바꾸고 출처를 삭제한다면, 위 문장들은 한국을 묘사하는 글로 보일 것이다.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 시기의 중국을 보고 지금의 한국이 떠오른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의식은 늘 존재해왔다. 문제는 그것이 실제적 상황으로 변했을 때 사회 갈등이 격화된다는 것. 지인들끼리 '어떤 부자의 삶'을 심심풀이로 이야기하며 부러워하는 것과, 1억 5천의 전세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부모님에게서 받은 4억5천으로 강남권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애초에 이러한 이유로 사랑을 시작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의 스트레스와 분노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건축학개론에서 술취한 서연을 부축해 방으로 데리고 가는 강남오빠를 바라보는 승민의 심정을 계속 느끼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같은 부의 격차라도 중국보다 한국의 케이스가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하게, 한국이 중국보다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균형을 통계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 정도 사이즈의 국토와 사람을 보유한 나라에서 지역별, 계층별 불균형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무리다. 그것도 고성장과 격변의 시기에서. 위화가 느끼는 중국의 불균형 정도가 어느 정도 수준일지 모르겠지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한국이 중국을 압도할 것이다.

한국의 불균형은 해소될 수 있을까? 그럴만한 시그널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현 정부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균형의 심화는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일전에 읽었던 책 '이케아 세대'의 주장처럼, 소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무언의 항거가 시작될까? 일부 공감은 가지만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결혼을 포기한 30대 직장인은 소비를 줄이고 월급을 저축할까? 아니다. 소비의 액수는 결국 결혼하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클 것이다. 나는 이것을 '포기적 소비'라고 부르곤 한다. 모아봤자 의미 없다는 생각에 다 쓰는 것. 즉, 부의 불균형은 소비침체에 따른 성장률 저하를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구성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 놓을 것이다. 30대를 예로 들었으나, 부의 불균형에 따른 교육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세대들도 마찬가지.
(불균형과 성장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인데, 이 링크를 읽어 보면 좋다. http://mobile.abc.net.au/news/2014-12-02/does-the-gap-between-rich-and-poor-affect-a-countrys-growth/5906486)

결국 한국은 중국화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원래 중국화되어 있었고,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다. 위대한 리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시스템적인 자정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까지도 우리는 중국을 닮았다.




2. 글쓰기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의 대자보 쓰기와 오늘날 블로그 쓰기가 갖는 한 가지 공통점은 둘 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115page)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137page)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147page)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대자보를 쓰고 있다.




3. 산채현상

산채현상을 사회 강자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로 가정한다면 이런 혁명은 44년 전의 중국에서도 대규모로 발생한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309page)



산채란 중국의 모방, 가짜, 삼류문화 등을 아우르는 단어다. 재밌는 점은 위화가 이 산채문화를 '사회 강자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로 가정해 보았다는 것.

이 가정에 동의하고 나면, 결국 매체의 발달과 인터넷 혁신이 반체제적인 응집력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고, 지인의 블로그에서도 보았던 문장이 '이 정도 불균형에서도 한국은 왜 조용한가' 였다. 아마도 그것은,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경로가 비교적 다채롭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인터넷을 통해. 내가 쓰고 있는 이 블로그라는 공간도 이 주장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전에 소개팅 자리에서 상대 여성이 축구와 야구 이야기를 오랜 시간 이야기 해 지루했던 경험이 있다(나는 축구랑 야구 관람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다).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갈 때 쯤 나는 '그런데 축구나 야구가 왜 그렇게 좋으세요' 라고 물었다. 내가 여성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면 99%는 '응원하는 분위기도 좋고 재밌어서요' 라고 답한다. 그런데 그 여성은 아주 의외의 대답을 해 나를 놀라게 했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것이 재밌어서요. 약팀이 어쩌다 강팀을 이길 때의 쾌감이 있어요!'

그 이후로 다시 만나지 않아 얼굴도 기억이 잘 안나지만, 위 문장은 아직도 생생하다.

2014년 12월 3일 수요일

My technical views (1)

1. JPY

단기 moving average 이탈 전까지 엔 약세 view 유지가 가능할 것. 기간은 5~10까지 아무렇게나 설정해도 문제 없다고 생각한다. 논팜 결과가 시장 기대치만 충족해도 추가 랠리가 가능하지 않을지. 일본 신용등급 하락을 보고 엔의 강세 전환에 섣불리 베팅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2. EUR

유로는 주간 차트. 밴드내로 회귀하지 않는 이상 유로 역시 short view 유지. 금주 ECB에서 국채매입 결정이 무산된다면 밴드를 한 번 터치할 가능성이 높다. 느낌상 내년 1~2월까지도 국채매입이 없다면 유로 숏은 일단 접고 보는게 편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