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26일 금요일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읽을 책, 읽고 있는 책, 다 읽고 리뷰를 쓰려는 책이 쌓여 있지만 그래도 선물 받은 책을 먼저 읽는 것이 맞겠다 싶어 위화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간다' 를 오늘 다 읽었다. 소설이나 수필을 거의 읽지 않는 나로서는, 선물 받지 않았더라면 접해 볼 일이 없었을 따뜻한 책이다. 그래서 책을 주고 받거나 돌려 보는 것은 즐겁다. 독서의 편식을 많이 줄일 수 있기 때문.

메모와 북마크를 많이 했지만 결국 책을 덮고 떠오르는 것은 세 가지다. 중국화 하는 한국, 글쓰기, 산채현상.


1. 중국화 하는 한국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간 마오쩌둥 시대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사람들 대부분이 막연한 그리움 때문에 그렇게 느낄 뿐, 정말로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마오쩌둥 시대는 비록 생활이 궁핍하고 인간 본성에 대한 압박이 심했지만, 보편적인 잔혹함이나 생존경쟁은 없었다.
(중략)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은 완전히 다르다. 극심한 경쟁과 거대한 압력이 수많은 중국인의 생활과 생존을 전쟁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사회 환경에서는 자연스레 약육강식의 논리와 함께 호화스러운 사치 추구와 온갖 속임수가 유행한다. 따라서 자신의 본분에 만족하면서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도태되고 담이 큰 사람들만 성공한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56page)

'차이'라는 단어가 좁은 의미에서 넓은 의미로 확대되고 공허한 사상에서 실제적 상황으로 변해버린 뒤, 오늘날 중국이 안고 있는 사회문제의 확장과 사회갈등의 격화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205page)

어떤 사람이 계산한 바에 의하면 오늘날 자녀 하나를 대학에 보내려면 도시 주민의 4.2년치 수입을, 농민의 13.6년치 수입을 고스란히 갖다 바쳐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대약진식 신입생 모집으로 인해 대학졸업생들의 취업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현재 매년 백만 명 이상의 대학 졸업자들이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고, 이는 이미 중국의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자녀들이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느라 가산을 탕진하고 빚에 허덕이는 가난한 부모들이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자녀들은 졸업과 동시의 중국의 방대한 실업자 대열의 일원이 되고 만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229page)



단어 몇 개만 바꾸고 출처를 삭제한다면, 위 문장들은 한국을 묘사하는 글로 보일 것이다. 문화대혁명과 덩샤오핑 시기의 중국을 보고 지금의 한국이 떠오른다는 것은 참담한 일이다.

저자의 말처럼 부의 격차에 대한 문제의식은 늘 존재해왔다. 문제는 그것이 실제적 상황으로 변했을 때 사회 갈등이 격화된다는 것. 지인들끼리 '어떤 부자의 삶'을 심심풀이로 이야기하며 부러워하는 것과, 1억 5천의 전세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고민하는 중에 부모님에게서 받은 4억5천으로 강남권에서 신혼을 시작하는 친구를 바라보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심지어 애초에 이러한 이유로 사랑을 시작할 수 조차 없는 상황이라면, 그 사람의 스트레스와 분노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건축학개론에서 술취한 서연을 부축해 방으로 데리고 가는 강남오빠를 바라보는 승민의 심정을 계속 느끼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같은 부의 격차라도 중국보다 한국의 케이스가 더욱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아주 단순하게, 한국이 중국보다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균형을 통계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겠으나, 그 정도 사이즈의 국토와 사람을 보유한 나라에서 지역별, 계층별 불균형이 없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무리다. 그것도 고성장과 격변의 시기에서. 위화가 느끼는 중국의 불균형 정도가 어느 정도 수준일지 모르겠지만,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받는 스트레스의 양은 한국이 중국을 압도할 것이다.

한국의 불균형은 해소될 수 있을까? 그럴만한 시그널은 보이지 않는다. 적어도 현 정부에서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균형의 심화는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일전에 읽었던 책 '이케아 세대'의 주장처럼, 소비를 줄이는 방식으로 무언의 항거가 시작될까? 일부 공감은 가지만 불확실하다. 예를 들어, 결혼을 포기한 30대 직장인은 소비를 줄이고 월급을 저축할까? 아니다. 소비의 액수는 결국 결혼하는 사람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클 것이다. 나는 이것을 '포기적 소비'라고 부르곤 한다. 모아봤자 의미 없다는 생각에 다 쓰는 것. 즉, 부의 불균형은 소비침체에 따른 성장률 저하를 불러일으키기 보다는, 구성원들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꿔 놓을 것이다. 30대를 예로 들었으나, 부의 불균형에 따른 교육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에 다른 세대들도 마찬가지.
(불균형과 성장의 관계에 대한 논란은 현재진행형인데, 이 링크를 읽어 보면 좋다. http://mobile.abc.net.au/news/2014-12-02/does-the-gap-between-rich-and-poor-affect-a-countrys-growth/5906486)

결국 한국은 중국화되고 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원래 중국화되어 있었고,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다. 위대한 리더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시스템적인 자정기능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까지도 우리는 중국을 닮았다.




2. 글쓰기

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의 대자보 쓰기와 오늘날 블로그 쓰기가 갖는 한 가지 공통점은 둘 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115page)

혼자서 뭔가 경험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을 이해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신이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137page)

누구나 일생을 통틀어 표현하고 싶은 무수한 욕망과 감정을 품게 된다. 하지만 실제 현실과 개인의 이성과 지혜가 이를 억누르고 만다. 하지만 글쓰기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억압된 욕망과 감정을 충분히 표출할 수 있다. 나는 글쓰기가 사람의 심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고 인생을 더욱더 완전하게 만들어준다고 믿는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147page)



맞는 말이다. 나는 지금 대자보를 쓰고 있다.




3. 산채현상

산채현상을 사회 강자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로 가정한다면 이런 혁명은 44년 전의 중국에서도 대규모로 발생한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바로 문화대혁명이다.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위화, 309page)



산채란 중국의 모방, 가짜, 삼류문화 등을 아우르는 단어다. 재밌는 점은 위화가 이 산채문화를 '사회 강자집단에 대한 약자집단의 혁명행위'로 가정해 보았다는 것.

이 가정에 동의하고 나면, 결국 매체의 발달과 인터넷 혁신이 반체제적인 응집력을 약화시킨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 도달한다. 예전부터 많이 들어왔고, 지인의 블로그에서도 보았던 문장이 '이 정도 불균형에서도 한국은 왜 조용한가' 였다. 아마도 그것은,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경로가 비교적 다채롭기 때문이 아닐까. 특히 인터넷을 통해. 내가 쓰고 있는 이 블로그라는 공간도 이 주장에서 자유롭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전에 소개팅 자리에서 상대 여성이 축구와 야구 이야기를 오랜 시간 이야기 해 지루했던 경험이 있다(나는 축구랑 야구 관람을 자주 즐기는 편은 아니다). 이야기가 마무리 되어갈 때 쯤 나는 '그런데 축구나 야구가 왜 그렇게 좋으세요' 라고 물었다. 내가 여성에게 이러한 질문을 하면 99%는 '응원하는 분위기도 좋고 재밌어서요' 라고 답한다. 그런데 그 여성은 아주 의외의 대답을 해 나를 놀라게 했었다.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것이 재밌어서요. 약팀이 어쩌다 강팀을 이길 때의 쾌감이 있어요!'

그 이후로 다시 만나지 않아 얼굴도 기억이 잘 안나지만, 위 문장은 아직도 생생하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