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23일 수요일

휴가

월,화 휴가를 내고 쉬었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휴가 때마다 여행을 가는 것은 소모적이라고 생각한다. 실컷 책 읽고 운동하는게 훨씬 충전이 잘 된다. 게다가 이런 날씨를 두고 해외에 갈 필요가 과연 있을지. 얇게 입고 열심히 돌아다니기에 딱 좋은 날씨다.

금요일에 퇴근 후 집에 가려는데 친구에게 연락이 와서 여의도에서 저녁을 먹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큰 주제는 커리어와 트레이딩이었다. 많이 배울 수 있는 사람 밑이라면 페이를 깎아서라도 갈 생각이 있는데 그런 자리를 찾기가 어렵고, 애초에 금융권 내에서 업사이드 포텐셜이 높은 보직의 수 자체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에 이 친구의 고민이 있었다. 이 친구처럼 나보다 대략 머리가 열 배는 더 좋은 사람들이 금융업의 미래에 의문을 품는 모습을 꽤 자주 보는데, 그럴 때면 확실히 이 분야조차 역동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느낌을 크게 받는다. 5년간의 박스피에는 생각보다 많은 현상들이 투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답답한 마음으로 귀가를 하다가 찾은 단골바에서 내어 준 핸드릭스 진토닉 위의 꽃을 보고서야 내가 휴가임을 다시 깨달았다. 9천원의 행복.


휴일에 조조영화를 예매해 두면 늦잠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을 지난주에 깨닫고 이번엔 스포트라이트를 봤다. 영화에서 가해자 수가 추산될 때 등장인물들은 쇼크를 받는다. 가해자가 13명이면 일탈이지만 90명이면 시스템의 문제다. 13명만 찾았을 때도 sick leave를 통한 조직적 은폐의 정황은 충분히 포착됐지만, 취재팀의 정치적 입지가 강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90이라는 추산치가 나온 다음이다. 13명의 은폐 정황을 찾은 것이 90명의 추산치보다 더 놀라운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었지만 (내가 극 중 기자 마이크스러운 기질이 없지 않아서), 영화 전반이 워낙 뚜렷하고 흥미진진해서 그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은 맛스타드림의 "남자는 힘이다", 가이트너의 "스트레스 테스트" 두 권을 사서 봤다. 웨이트트레이닝을 6년간 하면서 근력은 꽤 유지하고 있었는데, 근력과는 별개로 체력의 고갈이 느껴지길래 얼마전 버피와 달리기를 루틴에 추가한 뒤로 나름 효과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맛스타드림에 따르면 달리기고 뭐고 스쿼트가 스트랭스 증진엔 단연 최고다. 그리고 저중량 고반복으로는 몸매를 가꿀 수는 있어도 스트랭스를 높힐 수는 없으므로, 결국 고중량 저반복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프리스쿼트는 그동안 몸무게 수준으로 놓고 10개씩 4세트 정도 했는데, 몸무게 1.5배의 무게로 20개 하는 슈퍼스쿼트를 목표로 잡아 볼 생각. 그리고 풀오버도 루틴에 넣기로 했다.

스트레스 테스트는 아직 다 읽지 못했지만 워낙 재밌어서 주말에 금방 끝낼 수 있을 듯. 많은 사람들의 본인의 현재 모습이나 궁극적 지향점에 부합하는 가짜 스토리를 억지로 만들어 내려는 유혹에 휩싸인다. 가이트너는 그런 부류의 정 반대에 서 있다. 그는 '볼커 의장의 대학 졸업 축사를 듣고 훗날 정책담당자가 되라는 격려를 받았다' 라고 쓰고 싶지만 사실 그땐 Fed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도 몰랐으며 볼커의 축사는 음향이 나빠서 들리지도 않았다고 기술한다. 이 얘기를 트윗에 했더니 wclee님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런 가짜 스토리를 만들어 내지만, 사실 매력이란건 가이트너처럼 쿨내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이러니' 라고 피드백.

월요일엔 고흐전을 보러 서울역에 갔다가 전시관 휴관일이라 좌절하고 있는데, 회사 후임이 연락와서는 회의 시간에 무려 네오 피셔리즘(Neo-Fisherism) 이야기가 나왔다고 연락을 해줬다. 두가지 점이 놀라웠다. 1)그렇게 매니악한 주제가 회의에 등장하다니, 2)그런데 하필 그런 허술한 주장이 회의에 등장하다니. 불라드 총재의 최근 연설 내용 때문에 그 이야기가 회의에 등장한 듯 한데, 네오피셔리언들은 저금리가 저인플레를 조장하고 있으므로 금리를 인상하면 인플레도 올라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크루그먼은 금리와 인플레에 대한 실증적 근거가 너무 많기에 그런 주장에 따로 반박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런 주장은 단지 케인지언적 사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진영의 억지 논리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네오 피셔리즘과는 조금 다른 맥락이나, '저금리가 지속되면 어차피 계속 저금리라서 기업이 투자하지 않지만, 금리를 올리기 시작하면 금리가 높아지기 전에 돈을 끌어다 쓸테니 수요가 확대된다'는 주장도 가끔 보이는데 꽤 당황스럽다. 가이트너식으로 표현하자면 소방수가 화재의 원인.

어제는 김대표님이 시간을 내 주셔서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하루 전에 뜬금없게 연락드렸는데 감사하게도 흔쾌히 수락해주셨다. 평소에 대표님 글을 여러번 정독하다보니 말씀의 맥락이나 주제가 낯설진 않지만, 워낙에 컨텐츠와 생각이 많고 깊으시기에 대화에서는 또 다른 영감을 받곤 한다. 트레이딩을 포함해 라이프 전반에 대한 많은 이야기와 조언을 들었는데 역시 키워드는 '선택'. 좋은 선택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데 나는 과연 내 게으름을 얼마나 줄여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 리폿이 중간에 한 부분이 막혀 못 쓰고 있는데 3월까지는 마무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귀가 후 영어 오디오북을 한 권 더 샀다. 3월이 지나면 벌써 일을 시작한지 만 3년이다. 삶의 템포와 밀도를 더 높일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을 휴가를 통해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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