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23일 월요일

휴가

-1-
금요일 하루 휴가를 내고 오사카로 가족 여행을 갔다. 새벽에 내린 폭설로 출발이 지연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니나다를까 탑승시간이 한 시간 늦춰졌다. 한 시간 정도면 양호하다고 생각했지만 탑승한 뒤에도 비행기가 움직이질 않는다. 눈이 오면 기체에 붙은 얼음이나 눈을 털어내는 de-icing을 해야 하고, 그 de-icing은 특정 장소에 가야만 할 수 있는데, 활주로가 미끄러워 그 곳까지 이동할 수가 없어 따로 조치(아마도 비행기를 끄는 차)를 기다리고 있단다. 우여곡절 끝에 de-icing을 하고 '이제 이륙을 할 수 있습니다'는 방송이 나오자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4시간짜리 지연은 지연이라기 보다는 조난에 가깝다. 다른 항공편들의 지연 시간을 체크해보니 내가 탔던 제주항공의 연착이 제일 심했다. 내부 사정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항공편들의 스케쥴을 조정하는 과정에서 내가 탔던 항공편의 배치는 뒤로 많이 밀려난 듯 했다. LCC를 탄다는 것은 공항 상황을 크레딧으로 하는 후순위채에 투자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LCC도 지연이 3시간이 넘어가면 죄송하다며 에너지 바 하나를 간식으로 준다는, 굳이 배울 필요 없는 점을 하나 배웠다.


-2-
특별하게 정해진 일정 없이 편하게 먹고 관광할 목적의 여행이었어서 타격은 거의 없었다. 1년 반쯤 전 혼자 여행왔을 때 익혀놨던 길 중심으로 구경하며 열심히 먹고 마셨다. 그 때에 비해 중국인과 한국인이 더 많은 느낌이지만, 이런 단편적인 느낌을 근거로 '관광수요가 높다'거나 '소비가 좋다'는 식의 결론을 쉽게 내리는 것을 난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매크로 뿐만 아니라 개별 주식 분석에서도 마찬가지다. 카페에 사람이 많으니 카페 주식을 사자는 류의 분석을 나는 가급적 지양한다. 현장에서는 느낌과 아이디어만 받아가면 된다. 진짜 리서치는 어차피 책상에서 한다.


-3-
일본이나 대만을 여행하다 보면 길거리에서 얻는 아이디어나 느낌에 하나의 맥락이 있다. 이들은 좁은 곳에서 살고, 비교적 다양한 개성이 반영된 패션을 즐기며, 먹는 것은 로우엔드부터 하이엔드까지 두루 엄청나게 발달해 있다. 의식주를 비싼 순서로 나열하면 주, 의, 식이다. 좋고 넓은 곳에 사는(혹은 살 수 있는) 사람은 의, 식도 잘 즐길 수 있다. 좁은 곳에 살지만 의, 식만 즐길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마지막으로 좁은 곳에 살고, 좋은 옷도 부담이 되는 사람이라도, 먹는 것은 어느정도 즐길 수 있다. 먹는다는 것은 최후까지 남는 취향 표출 수단이자 저렴한 사치의 수단이 된다. 그래서 불황이나 저성장이 장기화될수록 '주', '의' 대비 '식'의 상대적 발달도가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한다.


-4-
도톤보리 근처를 거닐다가 어떤 걸그룹이 길거리 공연 중인 것을 발견했다. 공연을 관람 중인 사람들도 제법 많다. 공연장 앞 펄럭거리는 현수막에 '가면여자'라는 글씨가 보인다. 몇년 전 아베노믹스를 주제로 하는 다큐에서 봤던 기억이 있는 걸그룹이다. 가사에 양적완화, 인플레이션 2%, 아베노믹스 등의 단어가 등장하는 노래를 불렀던 그 걸그룹. 실제로 보게 될 줄이야.


-5-
돌아오는 날은 내 비행편만 3시간 지연되어 잠을 거의 못 자고 출근했다. 난 이제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제주항공은 피하게 될 듯.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