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7월 22일 토요일

베스트 오퍼 (스포 포함)

버질은 그의 본업인 경매와 친구 빌리를 통한 미술품 매집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둔 노신사다. 그는 진품과 가품을 구분할 수 있는 예리함과 더불어 미술품의 가치를 한 눈에 측정할 수 있을 정도의 심미성도 지니고 있다. 대다수의 심미적인 사람들이 그렇듯 버질도 취향이 분명하고, 조금은 까칠하다. 취향이 분명하고 까칠하면 외로워지는 경우가 많다. 즐겨 찾던 레스토랑에서 그를 위한 생일 축하 디저트를 준비하지만 버질은 입에 대지도 않고 자리를 뜬다. 혼자 그 디저트를 먹었다가는 더 외로워질 것 같기 때문이다. 버질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는 것은 그의 여성화 컬렉션들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외로움을 예술로만 채우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 컬렉션들뿐이야, 라고 버질은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성화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방 한가운데 앉아있는 버질의 표정은 쓸쓸하기만 하다. 컬렉션 룸의 벽면이 훌륭한 작품들로 빈틈없이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버질은 공허함에 사로잡힌다.

외로운 버질의 삶에 언제부턴가 클레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쁜 버질에게 전화로 징징대며 감정을 의뢰하는 클레어는 짜증나는 존재다. 워커홀릭인 버질은 처음엔 클레어가 아닌 클레어의 저택에서 발견한 로봇 부품에 호기심을 가진다. 그리고 클레어가 버질과의 약속을 잡고 취소하기를 반복하는 밀당을 시전하면서 버질의 호기심은 부품에서 클레어로 이동한다. 업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나를 바람 맞히는, 저택의 벽 안에서 수 년간 생활했다는 클레어가 누구인지 버질은 궁금하다.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저택에 숨어 벽 밖으로 나온 클레어의 아름다운 모습을 훔쳐본다. 그리고 클레어에 대한 호기심은 순식간에 사랑으로 바뀐다. 외로웠던 버질이 가짜 사랑에 현혹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벽 안에서만 생활하던 여인이 저런 모습일 수가 없다는 현실적인 의심을 버질은 하지 못한다. 또는 의심이 들더라도 이 정도로 아름답다면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해 버린다. 버질은 클레어에게 완전하게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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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공포증으로 벽에서 나올 수 없는 클레어를 버질은 도와주고 싶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벽에 갇혀있는 클레어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도와주면 클레어가 자신에게 마음을 줄지도 모른다고 버질은 기대한다. 곤경에 처한 상대를 구해 마음을 얻겠다는 연약한 로맨스다. 연약하다고 쓴 이유는 겉보기와 달리 그런 로맨스에는 구원하는 쪽의 근본적인 자존감 결여가 내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 이들은 상대의 곤경을 해결해주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상대에게 나를 어필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나를 어필하기 위해 상대를 일부러 곤경에 빠뜨리기도 한다. 경매사로 성공한 버질의 인생에 클레어만한 매력을 지닌 여자가 과연 한 명도 없었을까. 버질은 클레어의 신비로움에 매료된 것이기도 하지만, 곤경에서 구해내기만 하면 신비로운 클레어를 얻을 수 있겠다는 상황 자체에도 이끌린 셈이다. 괴한들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 버질을 보고 클레어가 집 밖으로 뛰쳐나오면서 그녀의 공포증은 치유된다. 나의 곤경으로 상대의 곤경이 해결되었다는 사실에 버질은 감격한다. 그리고 그의 컬렉션을 클레어에게 보여주며 프러포즈한다. 그의 일생을 건 베스트 오퍼다. 진품과 가품을 평생 구별하던 그가 제일 저렴한 가짜 로맨스에 가장 비싼 가격을 부른다. 클레어와 그녀의 일당은 버질의 컬렉션을 모두 훔쳐 잠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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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짜 속에도 진짜의 면모가 녹아 있다는 버질의 말은 사실이다. 가짜는 진짜를 모방하려 애쓰기 때문에 많은 가짜가 진짜의 아름다움을 상당 부분 공유한다. 때문에 심미성을 추구하는 사람일수록 가짜에 쉽게 현혹되는 경우가 많다. 감각만을 확장시켜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환상에 불과하다. 버질도 그림을 밸류에이션 할 때에는 작품의 아름다움에서 한 발짝 떨어져 분석적 안목을 발휘한다. 그러나 사랑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로맨스가 현실적 눈을 가리자 버질은 감정의 제물이 된다. 결국 가짜 사랑에 올인해 모든 것을 잃은 그는 '사실은 그 사랑이 진짜가 아니었을까' 라는 헛된 희망을 품고 프라하에서 클레어를 기다린다. 클레어와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이 전부 가짜였을 리 없다고 버질은 생각하지만, 그것은 위작을 앞에 두고 이렇게 잘 그린 그림이 가짜일 리 없다고 하는 것만큼이나 부질없는 일이다. 클레어는 프라하로 오지 않을 것이다. 모든 로맨스 속에는 위험한 면모가 녹아 있다. 그러므로 사랑에서도 현실적이고 분석적일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 과연 이 영화의 메시지일까. 내 생각에는 어차피 그럴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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