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에 외삼촌이 돌아가셨다. 토요일 저녁 외삼촌이 계신 중환자실에 들러 외숙모, 사촌형들과 인사를 하고, 늦은 밤에 동생을 데리고 나가 동네 단골 바 두 곳을 소개해주고 귀가했는데 거의 침대에 눕자마자 연락이 왔다. 빈소가 차려지는 동안 눈만 잠깐 붙인 후 병원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5남매 중 막내셔서 외삼촌 연세가 꽤 많으신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갑작스러웠다.외삼촌은 몇 주 전에 몸이 불편하시다며 그냥 걸어서 병원을 찾으셨다가 바로 간암 판정을 받고 혼수상태로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종합검진을 불과 1년 전에 받으셨는데 간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소견만 받고 별다른 추가 검사가 진행되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그 때 의사가 조직검사를 강력히 권유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토요일 저녁 중환자실에 들렀을 때 면회 인원 제한으로 나는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 때가 외삼촌을 뵐 수 있는 마지막 날일 줄은 몰랐다.
어머니를 포함해 외가 분들 대부분은 교직이나 공직 생활을 하셨었다. 외숙모들도 전부 선생님이시고 사촌형들 중에 공무원이 없는 점을 어렸을 때 신기하게 생각했었는데 대신에 공무원 형수님들이 많다. 돌아가신 둘째 외삼촌께서는 공직에 계시지 않아 어찌보면 집안에서 나름 희귀한 케이스셨지만 오히려 가장 엄격하고 완고한 공직자스러운 성품을 지니셨었다. 중학생 시절 외삼촌이 집에 오셨을 때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다가 '어른이 집에 왔는데 컴퓨터를 한다' 며 혼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사촌형은 귀가하기로 한 시간이 지나자 외삼촌이 집 문을 열어주시지 않았던 적도 있다고 한다. 사촌형의 나이가 무려 서른넷일 때다. 그렇게 완고하셨지만 마음이 차가운 분은 아니셨다. 명절 연휴엔 가끔 나를 따로 부르셔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셨고, 내가 운용사에 입사했을 때에는 취업난 때문에 원치 않는 작은 회사에서 할 수 없이 일을 시작한 줄로 오해하시고는 모 중견기업 대표로 계시는 친척분께 내 얘길 해 놓으셨다며 걱정말라고 하셔서 마음은 참 감사하지만 난감했던 경험도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모두 내가 아주 어릴적 돌아가셨기 때문에 사실상 친인척과의 이별은 나에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인간은 누군가의 영원한 부재에 슬픔을 느끼고, 그 슬픔을 느끼는 타인의 모습에서 또 다른 슬픔을 느낀다. 가족의 죽음은 두 슬픔의 무게가 모두 크다. 부재를 일상에서 계속 감당해야하고, 슬픔을 느끼는 타인이 또 다른 가족이기 때문이다. 20대 중반에 모친상을 당했던 한 친구는 화장장에서 외할머니께서 영정 사진을 쓰다듬으며 '아이고'라고 하실 때 장례식 내내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었다. 납골당 안치 직전 셋째 외삼촌께서 항아리를 어루만지며 외마디 울음소리를 내자 고요하던 공간이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어머니께서 인사를 드리는 순간에는 끝까지 볼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돌렸다. 거칠게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 유난히 생기 있는 납골당 정원 꽃들이 비현실적으로 보였는데 그곳에 삶과 죽음의 경계가 있는 것만 같았다.
어제 기분전환겸 가족들과 남산 주변을 산책하고 한남동에 파스타를 먹으러 갔다. 산책하고 저녁을 먹는 내내 어머니 표정이 밝았다. 오전에 셋째 외삼촌과 동두천에 가족묘 자리를 보고 오셨는데 자리가 전망과 볕이 아주 훌륭해서 기분이 좋았다고 하신다. '나도 나중에 갈 곳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어' 라고 하시는데 그런 말을 듣고 마음이 편안한 아들은 아마 없을 것이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여기 까르보나라가 맛있어' 라는 대답을 내가 드렸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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